'세월호 아버지' 구조 실패의 핵심 책임자들을 지목하다

정은주 입력 2019.12.14. 09:06 수정 2019.12.14. 09:16

                          
      
[토요판] 커버스토리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의 질문들
6년째 기록 10여만장을 분석하는
단원고 수현군 아버지 박종대씨
"진상 규명과 처벌의 불쏘시개인가
진실을 덮는 마지막 카드인가
검찰 특수단 수사는 양날의 칼"
지난달 28일 경기도 화성시 자택에서 아들 방으로 가는 복도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세월호 기록 책장을 아버지가 보여주고 있다. 5년8개월째 그는 새벽마다 이 기록을 들고 아들 방에서 홀로 기록과 마주한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검찰은 지난달 11일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을 꾸려 재수사에 나섰다. 특수단장은 “이번 수사가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백서를 쓰는 심정으로 모든 의혹을 철저하게 조사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하지만 6년 가까이 해경, 검찰, 감사원 등 정부기관이 만들어낸 참사 기록과 자료를 분석해온 세월호 희생자 아버지는 “2014년 검찰의 부실 수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먼저 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의 압력에 밀려 사고 현장에 도착한 해경만 ‘꼬리 자르기’ 식 처벌을 해놓고 대다수 증거 기록이 사라진 2019년에야 늑장 수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다시 칼자루를 쥔 검찰은 ‘침몰한 진실’을 인양할 수 있을 것인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불쏘시개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달 11일 검찰이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검찰 특수단)을 꾸려 본격 수사에 나선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박수현군의 아버지 박종대(55)씨는 이렇게 기대했다. 한편으로는 지난 6년간 속고 또 속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불안했다. ‘진실을 덮는 마지막 카드로 이용되는 건 아닐까.’

2014년 4월15일 ‘수학여행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하고 나갔던 아들이 돌아오지 않은 집에서 아버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들의 책상에 앉는다. 아들의 방과 복도를 가득 채운 세월호 관련 수사·재판기록, 국회와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제출된 녹취록과 진술서,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자료 등 문서 10여만장을 읽기 위해서다. 왜 내 아들을 구하지 않았는가, 정부가 밝혀내지 않은 그 답을 찾는 “죽기보다 힘든 작업”을 아버지는 5년8개월째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는 지난달 27일과 지난 4일 경기도 화성시 자택에서 아버지를 두차례 만났다. “참으로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검찰 특수단이 조사할 세월호 진상 규명 과제를 몇가지 꼽아달라는 요청에 아버지는 난감해했다.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역할을 못 했던 박근혜부터 말단 해경까지, 모든 정부 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개입된 사건이고 과거와 현재, 미래가 상존하는 대형 참사라서 몇가지로 압축해 답변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검찰 특수단에 브리핑을 하는 심정으로” 해경 수뇌부의 구조 방기, 122구조대의 늑장 출동과 수중 수색 시간 조작, 청와대의 상황보고서 은폐 등을 짚었다. 아버지가 심사숙고 끝에 제기한 핵심 의문을 <한겨레>가 정리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가 2015년 12월14일에 열려 김문홍 목포해경서장(앞)과 김석균 해경 본청장(뒤)이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①김문홍은 왜 구조 지휘를 하지 않았나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사고 현장은 구조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방송 장비를 갖춘 100t급 해경 경비정)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선내에 진입하기에 용이할 정도로 배가 기울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파도는 잔잔하고 수온도 낮지 않았다. 승객이 바다로 뛰어내리면 이를 구조해 태울 수 있는 선박(둘라에이스호)도 옆에 대기했다. 구조가 안 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경이 선내 진입도, 퇴선 방송도 하지 않으며 우왕좌왕하다가 구조에 실패했다.”

304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가 발생한 이유를 아버지는 “해경 수뇌부가 구조 지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해경 수뇌부란 해경 본청, 서해지방해양경찰청, 목포해양경찰서의 우두머리와 구조 책임자들을 말한다. 특히 최초의 ‘현장지휘자’인 목포해경서장 김문홍을 일차적 책임자로 지목했다. 당시 수난구호법과 관련 시행 세칙을 보면, ‘수난구조활동의 현장지휘는 지역구조본부장이 행한다’ ‘지역구조본부장이 일차적 수난구호 책임을 진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 어선 특별 단속을 지휘했던 김문홍은 이날 아침 헬기 512호를 타고 3009함에 내렸다. 조타실로 올라가자 부함장이 “지금 맹골도 근해에서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고 보고했다. 오전 9시3분이었다. 김문홍은 사고 현장으로 직접 이동해 구조를 지휘해야 한다. 하지만 헬기 512호만 출동시키고 가지 않았다. 각종 통신 장비를 갖춘 3009함에서 지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김문홍은 주장했다.

하지만 3009함은 그 후 세월호와 직접 교신을 시도하지 않았다. 해경 지휘부가 사고 소식을 공유한 문자상황보고시스템에도 9시16분부터 9시33분까지 17분간이나 참여하지 않았다. 김문홍의 침묵에 해경 본청 상황실이 “목포해경서장도 현장 복귀 지휘할 것”(9시37분)이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123정에 김문홍이 내린 첫 지시는 “힘줘, 힘 좀 내봐”(9시49분)였다.

서해해경청장 김수현은 항공구조 세력과 특공대를 지휘해야 했지만 세월호가 침몰할 때까지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는 사고 현장에 도착한 항공구조사를 선내에 진입시키는 대신 뒤집혀 가라앉는 6000t급 여객선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10시8분). “상식 밖”의 “말도 안 되는 지시만 반복”한 것이다.(2014년 감사원 감사결과보고서)

해경 본청장 김석균은 상황실에 언제 들어왔는지도 불분명하다. 김석균은 오전 9시5분께 세월호 사고를 보고받고 상황실로 이동했다고 주장했지만, 해경 본청 상황실 경비전화에는 9시28분에 김석균을 급히 찾는 전화가 녹음돼 있다. “야, 청장님 오셔야 돼.” “예, 지금 올라가셨습니다.”

구조 세력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 전 해경 수뇌부는 세월호의 상태, 현재 승객의 상황 등에 관한 정보를 파악해 승객 퇴선을 유도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돌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구조 계획을 세우는 지휘자가 단 한명도 없었다. 참사 이후에는 구조 실패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는 데 급급했다. 퇴선 방송을 한 것으로 거짓 기자회견을 하고 함정 일지를 뜯어고쳤다. 이 기자회견에는 123정장과 승조원이 출연했지만 해경 수뇌부가 철저히 기획·통제했다.

아버지는 “해경은 기본적으로 구조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이미 수색구조 매뉴얼이 있었지만 전혀 따르지 않았다. 구조를 방기한 해경 수뇌부를 검찰 특수단이 반드시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날 구조는 123정장 김경일이 혼자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해경 본청장 김석균부터 말단 해경까지 합동 작전을 펼쳐야 했다. 업무상 과실치사로 징역 3년형을 받은 김경일의 구조 실패 책임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9시30분부터다. 하지만 해경 수뇌부는 사고 신고를 접수한 9시부터 거의 100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도 2014년 검찰은 그 수뇌부를 제대로 불러 조사하지도 않았다.”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②122구조대는 언제 출동했나

잠수 능력을 갖춘 수난구호 전문 조직인 122구조대가 수색구조한 시각은 물론 사고 현장에 출동한 시간도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 122구조대는 해상 사고가 나면 즉각 출동해야 하지만 목포해경 122구조대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낮 12시15분이었다. 이들은 9시5분께 전원이 출동했지만, 배로 이동하면 30~40분이면 도착하는데, 차량을 이용하는 바람에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기록을 파헤치다가 목포해경 상황실 통화 내역에서 상황실과 122구조대 사무실이 9시21분, 22분에 통화한 사실을 찾아냈다. 일반적으로 통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통화 내역에 기록이 남지 않는다.

아버지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해경에 물었다. “해경 구조대가 9시5분께 출동했다면 텅 빈 사무실에서 누가 통화를 했다는 것인가?” 해경이 답했다. “당시 122구조대는 비번자 포함 10명이 모두 현장으로 이동, 구조에 투입돼 (구조대) 사무실은 비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통화 성공 여부 및 통화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빈 사무실에서 누군가 통화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누구인지, 어떤 내용으로 통화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상한 답변이다.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122구조대가 어디 소속이며 어떤 구조 활동을 했는지도 의문이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전파되자 각 지역의 해경 122구조대가 전남 진도 앞바다로 모여들었다. 군산항공대 헬기 502호도 122구조대 3명을 태우고 사고 현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서해해경청 상황실은 9시39분께 “서해해경청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서해해경청장 김수현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수현은 타지 않았다. 대신 정보수사과장과 특공대장이 올라탔다. 헬기 502호는 오전 11시 전에 사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사고 현장에서 헬기를 지휘하던 항공기 703호(초계기)의 교신 기록을 보면 10시38분께 헬기 502호에 지시한다. “닻 쪽에 침몰되어 있는 위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접근해보라.”

아버지는 헬기 502호가 태운 122구조대가 군산해경 소속이라고 판단한다. 이들은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122구조대였지만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다. 특공대장의 검찰 진술을 보면, “(헬기 502호가) 사고 현장 상공에 도착했으나 대형 함정이 없어 바로 착륙하지 않았”다고 돼 있다.(2014년 8월26일 검찰 진술조서) 대신 익수자 한명만 태우고 목포한국병원에 갔다가 헬기 502호는 서해해경청과 목포항공대를 거쳐 사고 현장에 오후 1시50분께야 되돌아왔다.

헬기의 이런 소극적 구조 활동은 항공기 703호의 지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해경이 파견한 항공기 703호는 사고 현장에 출동한 헬기들을 지휘했다. 세월호가 급속히 기울어져 좌현 5층까지 물에 잠긴 9시50분께 703호는 헬기에 지시한다. “해경 본청장께서 출발해 현장에 올 예정이니까 너무 임무에 집착하지 말고 안전에 유의하라.” 무리하지 말라는 지시는 세차례나 반복된다. “항공에서 할 수 있는 조치 없을 것 같다”(10시26분), “배가 90% 이상 침몰돼 구조할 수 없다”(10시30분)며 사실상 구조 활동을 포기한다.

아버지는 말했다. “재판·수사 서류를 다 뒤져봤는데, 배가 넘어가고 난 다음에 (해경이) 수중 수색 구조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했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다. 애초에 수중 수색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에 남아 있는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는 122구조대가 늑장 출동하거나 사고 현장에 도착해서도 구조 활동을 제대로 펼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해경은 수중 수색 시간을 조작한 적도 있지 않나. 이들의 행적을 낱낱이 되짚어 검찰 특수단이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해경은 122구조대 ‘최초 수중 수색 시간’을 조작했고 감사원이 이를 밝혔다. 목포해경 122구조대는 차량→어선→경비정→구명보트를 옮겨 타는 바람에 낮 12시15분께 사고 현장에 도착했고, 오후 1시께야 세월호 수색을 처음 시도했다. 하지만 정부는 참사 직후인 4월17일 “(오전) 11시24분 목포해경 122구조대가 첫 수중 수색 했지만 거센 물살 탓에 선체 진입에 실패했다”고 잘못 발표했다. 이에 맞춰 122구조대는 “현장 도착 시간을 11시15분에서 20분경”이라고 거짓말했다. 나중에 감사원이 ‘왜 거짓 보고를 했느냐’고 추궁하자 “침몰할 때 (122구조대가) 창문을 깨고 승객을 구조해야 했다는 비판이 들끓고 있어서”라고 해명했다.

세월호 희생 학생 박수현군의 집 풍경, 11월 28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원천리 자택, 올 해 초 수현이의생일을 맞아 부모가 사 준 새 구두 한 결레와 2016년 졸업 선물로 사 준 양복이 수현이의 유품 진열장 앞에 놓여 있다. 화성/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③청와대 상황보고서 1·4보의 행방은

박근혜 대통령의 참사 당일 행적을 밝힌 검찰의 ‘청와대 세월호 보고 조작’ 사건 수사 결과에 아버지는 동의하지 않는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구조의 ‘골든타임’ 마지노선인 10시17분까지 청와대 상황보고서 1보를 받지 않아 세월호 사고를 몰랐다가 비서관 안봉근이 대통령 관저로 찾아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김장수와 통화 연결을 하면서 사고를 처음 인지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청와대 상황보고서 1보가 대통령 관저에 도착한 시간은 10시20분께라고 짚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고 개요만 간략히 적은 별도의 1보가 따로 있었고, 보고 시점은 10시 이전이라고 본다. 근거는 이렇다. 첫째, 상황보고서 1보를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이메일로 전송한 국가안보실 위기관리센터 전아무개가 이를 캡처한 사진을 저장했는데, 그때 1보로 보이는 ‘140416 진도 인근 여객선 조난 신고.hwp’의 파일 크기(173kb)는 현재 1보(720kb)보다 훨씬 작다. 둘째, 상황보고서 1보를 작성한 이아무개는 세월호 톤수를 6647t으로 잘못 적어서 수정했다고 하는데 6647t이라고 적힌 상황보고서가 없다. 셋째, 참사 직후 첫 보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위기관리센터 직원 오아무개씨가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확인해보니 상황병이 9시40~50분께에 뛰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영상을 “나중에 문제 될까 봐” 따로 저장하지 않았고, 나중에 자동으로 덮어씌워졌다. 넷째, 상황병은 1보를 위민관 2층에 있는 김장수 실장이 아니라 대통령 관저로 전달했다고 기억한다.

상황보고서 4보도 박근혜 청와대는 오후 4시에 작성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버지는 오후 1시께 전송한 별도의 4보가 있다고 판단한다. 역시 이메일 캡처 사진을 보면, ‘진도 인근 여객선(세월호) 침수, 승선원 475명 구조작업 중(4보)’이 오후 1시22분께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발송돼 있다. 이메일을 전송한 안전관리센터 직원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이메일로 보낸 4보에는) ‘탑승객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 4보가 잘못된 것을 확인한 후 약 7분 후에 각 비서실에 다시 ‘4보 내용 중 구조 인원에 변동이 있다’는 이메일을 발송했다. 하지만 (오후 4시에 작성된 상황보고서 4보는) 전원 구조 관련 내용이 없다”고 밝혔다. 청와대 상황보고서 4보가 사라진 셈이다.

비서관 안봉근이 세월호 참사 당일 10시20분께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 국가안보실장 김장수, 해경청장 김석균과 대통령 박근혜의 통화를 연결했다는 검찰의 판단에도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근혜 탄핵 심판을 앞두고 변호사 유영하가 전화해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관서에 올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안봉근이 “나는 같이 가지 않았다”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진술했다는 행정관 이영선의 검찰 진술이 있기 때문이다. 또 박근혜가 불러서 갔는지, 김장수 전화를 받고 갔는지 안봉근 검찰 진술도 자꾸 바뀐다고 했다. 게다가 관저에서 일하던 경호관이나 내실 근무자가 그날 오전에 안봉근을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검찰은 (시시티브이나 화면 캡처 사진 등) 기계적 언어를 배제하고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진술한 하급자보다 변명에 급급한 상급자 진술을 채택했다”고 문제점을 짚었다. 이어 “검찰 특수단은 출범하면서 백서를 쓰는 심정으로 모든 의혹을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는데, 이는 기존의 검찰 수사를 뒤집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특수단 규모(검사 8명)나 구성원(청와대 보고 조작 사건을 수사한 검사 참여) 등을 볼 때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그런데도 ‘공소시효’ 등을 고려할 때 이번 수사가 책임자 처벌의 마지막 기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도 속아서 미심쩍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라도 품고 싶지만, 그 희망이 다시 절망으로 변하는 게 눈에 보이는 듯, 아버지는 복잡하고 답답해 보였다.

화성/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구조 실패한 ‘윗선’에 면죄부 준 2014년 검찰

2014년 검찰은 사고 현장에 도착한 첫 해경 함정인 123정 정장 김경일만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해 법원은 징역 3년형을 선고했다. 당시 소극적 구조 활동을 펼쳤던 헬기 등 항공 구조 세력이나 구조 지휘를 하지 않았던 해경 수뇌부에는 ‘면죄부’를 줬다. 해경의 초동 대응 실패로 304명이 목숨을 잃고 142명이나 다쳤으며, 법원이 “해경 지휘부나 사고 현장에 같이 출동한 해경들에게도 승객 구조 소홀에 대한 공동책임이 있다”고 밝혔는데도 말이다.

나중에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우병우가 검찰의 해경 수사에 외압을 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세월호 수사지원팀장인 윤대진 당시 광주지검 형사2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청와대와 해경 간 전화통화 녹음 파일을 꼭 압수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이번에 검찰은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특수단)을 꾸린 지 11일 만인 지난달 22일 인천 송도의 해경 본청과 서해해경청, 목포·완도·여수해경서 등을 동시에 압수수색했다. 특수단의 압수수색은 지난 2일까지 진행됐고, 해경 수뇌부의 소통 내역이 담긴 주파수 공용 통신(TRS)과 해경 상황실 경비전화 통화 내용 등 참사 당일 교신 내역의 ‘원본’이 이제야 확보됐다.

참사 당일 청와대의 행적이나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의 활동 방해 등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검찰이 수사해 김기춘·이병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기소됐다. 하지만 산발적인 검찰 수사만으로는 의혹이 규명되지 않았다. 결국 검찰은 특수단을 꾸려 형사처벌을 대상으로 한 혐의뿐만 아니라 세월호와 관련한 국민적 의혹을 전반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기로 했다.

앞서 세월호 진상 규명 활동은 2015년 출범한 1기 특조위와 2017년 꾸려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1년씩 조사를 벌였고,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가 지난해 3월 시작돼 조사를 이어왔다. 2기 특조위는 해경이 맥박이 남아 있는 학생을 발견하고도 병원에 헬기로 이송하지 않았다는 중간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수사권이 없는 1·2기 특조위의 한계가 거듭 드러나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은 전면 재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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