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장 속 삶은 싫어" K팝 아이돌의 이유있는 일탈

양승준 입력 2018.09.05. 04:44 수정 2018.09.05. 08:54

댄스그룹 '위너' 출신 남태현

YG 떠나 록밴드 음악으로 새 길

'소녀주의보' 멤버 2명은

깡마른 몸 거부 "60㎏" 공개

'공장형 기획상품' 편견 깨고

제 목소리 내는 아이돌 잇달아

그림 1 아이돌그룹 위너 출신 남태현은 YG엔터테인먼트에서 나와 록밴드 사우스클럽을 만들었다. 록밴드 롤링스톤스와 도어즈를 좋아한다는 남태현의 오른쪽 팔목엔 기타 연주 코드 중 하나인 '세컨더리 도미넌트 코드'가 새겨져 있었다. 사우스바이어스클럽 제공

‘기타, 드럼, 베이스, 피아노 연주 가능한 연주자만 메일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1월 온라인에 이런 내용이 담긴 록밴드 모집 공고문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흔한 밴드 모집 공고가 온라인을 달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성 댄스 그룹 위너 출신 남태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함께할 밴드 멤버를 직접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전자 댄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아이돌의 록밴드 모집 공고라니. 남태현은 2016년 겨울 돌연 위너와 YG엔터테인먼트(YG)를 떠났다. 고 2때부터 YG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 아이돌의 ‘일탈’이었다.

YG 떠나 로커로… “날 잃어 가는 느낌”

남태현의 행보는 180도 달라졌다. 그는 4인조 록밴드 사우스클럽을 꾸려 거리로 나섰다. 지난달 28일 서울 부암동 인근 카페에서 만난 남태현은 “대구 수성못에 갔는데 공연 사전 신고를 하지 않아 경찰이 찾아와 쫓겨났다”며 “그걸 본 한 카페 사장님이 우리 가게 와서 연주하라고 해 다행히 즉흥 공연을 이어 갔다”고 말하며 웃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대형 가요 기획사의 철저한 관리를 받으며 혼자선 은행 업무도 보지 못했다는 청년은 홀로서기를 하면서 겪은 성장통을 훈장처럼 여겼다.

로커로 변신한 아이돌에게 록은 ‘패션’이 아니었다. 사우스클럽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5월까지 낸 두 장의 앨범 ‘90’과 ‘20’은 1960~1970년대 블루스 록에 단단하게 뿌리를 뒀다. 대형 가요 기획사의 안전한 둥지를 떠난 것을 두고 “비포장도로를 뚫는 걸 좋아한다”고 비유하며 웃은 남태현은 히피 같았다.

“(YG에서의) 만들어진 삶에 저 자신을 잃어 가는 느낌이었어요. 새로운 장르, 스타일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그런지란 록 장르로 새 길을 냈듯 말이죠. 꿈은 크게 가지라고 어려서부터 배웠거든요, 하하하.”

여성그룹 에프엑스 멤버인 엠버는 청순하거나 섹시한 여성성을 강요하는 K팝 시장의 벽을 허무는 첨병이다. 엠버는 '언제 여자가 될 거야?'라는 '악플러'들에 "원하는 스타일대로 사는 게 여자"라고 답한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감정 노동 최고조” 높아진 아이돌 인권 감수성

방탄소년단이 올해에만 두 차례 빌보드 정상에 올라 K팝의 위상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해외에서 바라보는 K팝 산업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K팝엔 그림자처럼 ‘공장형 아이돌’이란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기획사가 소속 연습생을 훈련해 그룹을 꾸리고 팀 색깔에 맞는 곡까지 만드는 한국적 시스템이 기이하게 보이는 탓이다. K팝 등 한류 콘텐츠에 대한 부정적 요인으로 ‘북한의 위협’ 다음으로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의견이 많았다. 국제교류원이 중국, 미국, 영국 등 16개국 7,8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해 지난 5월 발표한 내용이었다. 밖에선 여전히 K팝을 ‘기획상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편견을 깨고 K팝 아이돌이 ‘새장’을 벗어나고 있다. 남태현처럼 대형 가요기획사를 나와 직접 제 음악을 하는가 하면 일부 여성 아이돌은 K팝 산업의 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거침없이 꼬집으며 반격에 나서고 있다.

여성그룹 에프엑스 멤버인 엠버는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랜 시간 동안 전 다른 사람들의 편견들로 인해 제 몸을 창피하다고 여겼다”는 글을 올렸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제가 연약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목표를 포기해왔는데” 더 이상 그러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한 스포츠 의류 광고를 위해 올린 문구였지만, 엠버는 꾸준히 K팝 시장의 정형화된 여성성을 깨부수고 있다. 지난해 유튜브에 올린 ‘Where Is My Chest(내 가슴 어디 있지)?’ 동영상이 대표적인 예다. 엠버는 “가슴아”를 외치며 동네를 누비며 가슴을 찾는 블랙코미디 상황극으로 8년 동안 ‘악플러’로부터 여성성을 부정당한 것을 정면 돌파한다.

여성그룹 소녀주의보 멤버인 지성. 건강한 체구로 '복지돌'로 불린다. 무리한 식이요법과 체중 감량은 하지 않는다. 지성은 킥복싱을 배우며 기초대사량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녀는 뭐든지 할 수 있다’의 파장

무대 밖에서 수동성을 깨는 여성 아이돌의 행보는 작지만 잇따르고 있다. 에이핑크 멤버인 손나은은 지난 6월 SNS에 ‘소녀는 뭐든지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는 문구가 적힌 휴대폰 케이스 사진을 게시했다. 획일화와 강요된 규범을 거부하는 ‘21세기 히피 아이돌’의 등장이다. 김헌식 동아방송대 교수는 “소비로 사회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미닝아웃’ 유행과 맞물려 있다”고 분석했다.

‘미투’를 거치며 부각된 여성 운동과 맞물려 인권 감수성이 예전보다 민감해진 사회적 분위기도 21세기 히피 아이돌 등장의 밑거름이다.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은 “K팝 아이돌은 노래와 춤을 비롯해 역사와 외국어는 물론 인권 문제까지 배워 팬서비스해야 한다”며 “최고조에 달한 감정 노동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해석했다.

인식의 변화는 여성 그룹의 색깔까지 바꿨다. 최근엔 엄격한 체중 관리에 맞서는 여성 그룹까지 등장했다. 소녀주의보는 ‘복지돌’로 불린다. 키가 160㎝ 후반인 소녀주의보 멤버 지성과 슬비는 60㎏ 초반의 체중으로 데뷔했다. 종이 인형처럼 마른 여성그룹이 많다 보니 되레 건강미로 화제다. 하지만 지혜원 대중문화평론가는 “여성 아이돌은 무대 위에선 여성성을 요구받지만, 무대 밖에서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내면 화살을 받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며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mailto: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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