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치니 '억' 하고"..박처원 총애 받은 이근안 반성할까

한승곤 입력 2018.01.08. 10:50 수정 2018.01.08. 11:33 
수사대상자들을 불법 감금.고문한 혐의로 수감됐던 이근안(68)씨가 2006년 11월7일 새벽 징역 7년의 형기를 마치고 경기도 여주교도소를 나와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 (여주=연합뉴스)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지금도 정권 바뀌었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게 있냐고 이야기 하는 분들도 계신다. 이 영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영화가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영화 '1987'(장준환 감독)을 관람하고 이같이 소감을 밝혔다. 영화 ‘1987’이 8일 오전 기준 누적관객수 400만을 넘기면서 1980년대 민주주의를 유린한 가해자들이 2017년 문재인 정부로 소환되고 있다. 극 중 잔혹한 고문을 자행하며 민주화 운동 인사를 대상으로 불법 자백을 끌어내는 대공수사처 수장 ‘박처장’(김윤석 분)은 실제 인물 박처원을 모티브로 했다.

당시 박처원은 ‘대공경찰의 대부’로 불리며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이른바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그 대가로 거액의 돈을 건넸다. 그는 이 사건으로 1996년 대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선고 당시 서울대 병원에 입원 중인 박처원은 병원에 머물면서 점차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졌다. 이렇게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박처원은 1999년 11월 이른바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의 도피를 지시하고 도운 혐의로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다.

박종철이 물고문당한 남영동 대공분실/사진=연합뉴스

◆ 또 다른 박처원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장

당시 보도에 따르면 박처원은 이근안에게 1500만원의 도피 자금을 제공했다. 자금의 출처는 김우현 전 치안본부장이 카지노업계 대부 전낙원 씨로부터 기부받은 돈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처원은 이같은 혐의로 2000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1989년 6월 퇴직한 박처원은 퇴직 이후에도 그해 말까지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근무했으며, 10억 원을 받은 뒤에는 개인 연구소를 차려 퇴직한 대공 수사 경찰들의 일자리로 활용됐다.

한홍구 역사학자에 따르면 1947년 스무살의 나이로 경찰에 투신한 박처원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 은폐조작으로 물러날 때까지 주변에 이른바 박처원 사단을 형성했다. 특히 대공조직과 부하들 간의 의리를 남달리 강조한 그는 고문에 따른 대공수사에서 남다른 활동을 벌인 이근안을 총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처원이 총애한 이근안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8년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했다. 1972년 8월 경찰청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으면서 이후 1987년까지 경기도지방경찰청 등에서 대공, 강력계, 살인사건, 방첩 전문 수사관 등을 맡았다.

특히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민청련) 의장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불렸던 김근태 당시 의장을 고문하는 등 많은 민주화 인사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해 '고문기술자‘로 불렸다. ‘민청련동지회’ 글에 따르면 1985년 8월24일 체포된 김근태는 참혹한 고문과 학대를 9월4일부터 9월20일까지 17일 동안이나 계속 받았다.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사진=아우라픽쳐스

◆ 김근태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근안 “고문은 예술”

김근태 증언에 따르면, 전기고문을 할 때에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다. 또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맸다. 이같은 이유는 신체에 고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가 잘 통하도록 물을 뿌렸고, 발가락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김근태는 이 고문에 대해 핏줄이 뒤틀리고 신경을 잡아 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 또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다고 전했다. 그런가 하면 밑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물고문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근안은 당시 김근태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으로 옥사한 주범)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1988년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불법 체포 및 고문을 시도한 혐의로 수배된 이근안은 약 10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1999년 검찰에 자수함으로써 이듬해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2006년 11월에 출소한 이근안은 2008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으나 설교 중 “고문은 예술이었다”등 망언을 해 김근태에 대한 고문 책임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목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당시 이근안이 속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총회는 긴급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씨가 목사로서의 품위와 교단의 위상을 떨어뜨렸으며 겸손하게 선교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다는 판단에 따라 이같이 징계했다”고 밝혔다.

2012년 12월14일 이근안씨가 서울 성동구의 한 식당에서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한편 이근안 출소 당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2006년 11월7일 열린 당직자 월례조회에서 “(재작년 면회를 갔을 때)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 의장은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며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고 말한 바 있다.

훗날 김근태는 2012년 1월 자신이 집필한 ‘남영동’을 통해 “이 고문담당 기술자는 망나니였습니다. 숨통을 막아버리고 목줄띠를 끊어버리는 인간 백정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요기어린 파르스름한 달빛이 감도는 황야에서 작두칼을 휘둘러대는, 미쳐버린 인간 백정이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이근안은 같은해 12월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를 통해 “애국행위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일을 해 옥조근정훈장까지 받았지만 5공 정권이 사라지자 고문기술자라는 대명사가 붙어 매도됐다”며 억울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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