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6년간 투명인간.. '미국판 이태원 살인' 범인의 결정적 실수

김수경 기자 입력 2017.12.02. 03:02 
부산발 KTX, 흰 옷에 갈색 가방.. 주민증 사진만으로 체포 작전
2011년 12월 8일
새벽까지 불법 영업하는 한인 포장마차서 시비
피해자는 호스트바 직원.. 현지서도 처음 보는 사건
제2의 '이태원 살인'
공범들 "진범 따로 있다" 용의자는 본국 도피
몇 달마다 직장 옮기며 철저하게 숨어 살아
어떻게 덜미 잡혔나
누나 통화 내역 10만건 중 전원 자주 꺼진 회선 발견
부산 군대 동기 만나던 날 자주 켠 전화로 위치 파악

지난 11월 1일 오후 8시쯤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서울역 승강장 곳곳에 숨어 있던 서울경찰청 인터폴 추적팀원들의 눈이 바빠졌다. 승객 수백 명 사이에서 한 남자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흰색 셔츠를 입고 옆으로 메는 갈색 가방을 갖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주민등록증에 붙어 있는 증명사진 한 장으로 얼굴을 식별해야 했다. 키나 몸집 크기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열차가 도착하자 승객들이 개찰구 쪽으로 쏟아져 나왔다. 날카로운 형사 한 명이 흰 셔츠에 갈색 가방 차림인 한 남자의 팔을 낚아챘다. 도망치지 못하게 또 다른 형사 한 명도 반대쪽 팔을 재빨리 껴안았다. 2011년 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한국으로 들어와 도망 다니며 살던 살인사건 용의자 박모(31)씨를 6년 만에 검거하는 순간이었다.

한인타운 술집에서 벌어진 말다툼

박씨는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살았다. 한국인이 10만명 정도 살고 있는 대도시다. 애틀랜타에서도 한국인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은 크게 두 지역인데 박씨는 그 중 한 곳인 덜루스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박씨가 언제부터 미국에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지 교민들에 따르면 그는 영주권자이거나 시민권자는 아니었다. 한인들 사이에서 박씨는 평범한 학생으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제대로 학교에 다녔다기보다 미국 비자를 유지하기 위해 학적을 갖고 있던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 교민은 박씨에 대해 "음주운전이나 폭행 시비에 휘말린 적도 없을 정도로 조용히 살았다"고 기억했다.

사건의 시작은 2011년 12월 8일 새벽 4시쯤 덜루스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던 실내 포장마차였다. 이곳은 한인타운에서 유일하게 새벽까지 영업하는 곳이며, 근처 술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박씨가 일을 끝내고 찾는 단골집이었다. 이날도 박씨는 함께 종업원으로 일하던 신모(36), 이모(31), 강모(26)씨와 함께 이 포장마차를 찾았다. 당시 포장마차에는 현지 호스트바에서 일하던 고모(당시 32세)씨와 친구, 여성 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일행이 술에 취한 뒤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 "버릇이 없다"며 말싸움을 벌였지만 술집 주인과 고씨 측 여성들의 만류로 큰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오전 6시쯤 고씨 일행이 계산을 하고 포장마차를 나설 때쯤 싸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박씨 일행 4명은 모두 담배를 피우려고 주점 밖 주차장으로 나가 있던 상황이었다. 이들이 먼저 "비웃었다"며 욕설을 했고 서로 간에 주먹도 오갔다. 30분가량 벌어지던 몸싸움은 고씨 일행이 차에 타면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박씨 일행은 고씨가 타고 있던 차 앞뒤를 가로막고 조수석에 앉아 있던 고씨를 차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러던 중 운전을 하던 고씨 친구가 가속 페달을 밟아 박씨를 차로 치어 쓰러뜨렸다. 화가 난 박씨 일행 중 누군가가 고씨를 차에서 끌어낸 뒤 가지고 있던 흉기로 목과 옆구리를 수차례 찌른 뒤 차를 타고 달아났다. 고씨와 함께 술 마시던 일행은 싸움이 격해지자 차를 타고 현장을 떠난 상태였다. 주차장에서 피를 심하게 흘린 채 쓰러져 있던 고씨는 오전 7시가 돼서야 시민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붙잡힌 용의자 모두 "범인은 박씨"

초기 수사는 미궁에 빠졌다. 덜루스에서는 새벽 1시 30분 이후 술집 영업을 금지하고 있는 터라 목격자를 찾기 어려웠다. 주차장에 있는 CCTV도 사건 현장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용의자를 식별하기 어려웠다. 2~3개월마다 도시를 이동하면서 호스트바 일을 하던 탓에 고씨에 대한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20m쯤 떨어져 있던 한 택시기사뿐이었다. 택시기사가 몸싸움하던 이들의 얼굴을 식별하면서 이씨와 신씨가 붙잡혔고 강씨는 자수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가지고 있던 칼을 꺼내 찌른 것은 박씨"라며 자신들은 "살인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다. 박씨는 사건 발생 이틀 뒤 한국으로 급히 귀국한 상태였다.

미국 법원은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3명의 보석 신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 하지만 3명의 주장이 일관되고 박씨가 붙잡힐 때까지 재판이 정지되면서 3명에게 각각 5000~1만달러의 보석금을 받고 풀어줬다. 덜루스 경찰 역시 사건 현장 CCTV와 맞은편 대형 할인마트 주차장 CCTV를 정밀 분석한 결과, 칼을 꺼내 찌른 사람은 박씨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공범들이 모두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지목당한 용의자는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 지난 1997년 이태원 햄버거집 화장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비슷해 이 사건은 '미국판 이태원 살인사건'으로 회자됐다. 미국 현지에서는 호스트라는 피해자 직업과 법을 어겨가며 새벽까지 영업하는 한국 술집이 있다는 사실 등 사건 이외의 내용까지 화제가 됐다. 애틀랜타 한인회에서는 위상 실추를 막겠다며 한인 사회 정화운동까지 벌였다.

늘 꺼져 있는 전화번호의 주인

사건 발생 6년이 지난 올해 6월 미국 법원에서 우리나라 법무부에 박씨를 붙잡아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국제범죄수사대까지 사건이 내려온 건 지난 9월 18일이었다. 서울경찰청 인터폴팀이 박씨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는 그의 얼굴 사진 한 장과 주민등록번호, 주민등록상 거주지, 그리고 박씨가 한국으로 들어올 때 공항에 냈던 입국신고서뿐이었다. 경찰이 맨 처음 찾은 그의 거주지는 한 식당 건물 2층이었다. 한국에 들어올 때 거짓 주소로 등록한 것이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6년이 지났지만 박씨는 철저히 숨어 살고 있었다. 주소를 여러 번 옮긴 것은 물론이고 휴대전화도 다른 사람의 명의로 가입했다가 해지한 뒤 다시 자신의 명의로 돌리는 방법을 써 추적을 피했다. 회사도 몇 개월 단위로 자주 옮겼다. 지난 2013년 경기 고양시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몇 차례 들른 일 말고는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 적도 없었다.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에도 흔적조차 없었다.

경찰은 한국에 있는 박씨 친누나를 추적했다. 박씨가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사는 터라 한국에서 연락할 만한 유일한 가족이 누나였기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다세대 주택에 살던 누나 집에 경찰이 며칠 잠복했지만 박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이 박씨 누나의 통화 내역 10만 건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몇 개 번호를 주목할 수 있었다. 그 번호 중 휴대폰 전원을 대부분 시간 꺼놓는 회선을 하나 발견했다. 40일간의 추적 중 휴대전화가 켜져 있는 시간이 10시간 안팎에 불과했다. 서울 종로구 한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일하던 박씨는 일산에 있는 집과 회사를 오가며 매우 폐쇄적인 생활을 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서울역에 내리는 용의자를 잡아라

박씨가 붙잡힌 날은 경찰이 박씨를 추적한 40일간 유일하게 휴대전화를 자주 켠 날이었다. 한 시간 단위로 휴대전화를 끄고 켰다. 3일 전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 사는 군대 동기를 만나러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간 날이었다. 친구와 어디서 만나는 등 약속을 정하기 위해 휴대전화 전원을 자꾸 켠 것으로 보였다. 인터폴팀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박씨의 휴대전화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 부산에 갔고 광안리 등 여러 곳에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였다. 이날 고속버스에 오르는 박씨의 모습으로 경찰은 최초로 유력한 용의자 얼굴을 확인했다. 박씨가 고속버스로 상경할 것으로 예상한 경찰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박씨의 휴대전화 위치가 부산역으로 잡히자 서울역으로 잠복 장소를 옮겼다. KTX를 탈 것으로 예상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박씨는 현재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미국 현지 법원에 따르면 박씨의 살인 혐의가 인정되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법무부는 미국과 맺은 범죄인 인도 조약에 따라 서울고등법원에서 박씨의 신병을 미국에 넘겨줄지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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