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나라에서 사기치고 도주한 명문대 출신 대기업 사원

류인하 기자 입력 2019.01.26. 12:13 수정 2019.01.26. 12:16

               

[경향신문]

명문대 공대 출신 대기업 선임연구원이 억대의 사기행각을 벌이고 미국으로 도주했다. 사기행각의 주무대는 중고제품 거래사이트 ‘중고나라’였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이렇게 감쪽같이 속을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알려진 피해자만 30여명에 달한다.

연구원 신분 드러내며 의심 안 사

ㄱ씨(31)는 지난해 각종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 가전제품을 직원 할인가보다 더 싼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게시글을 중고나라에 올렸다. 중고 제품이 아닌, 출고도 되지 않은 최신 제품들이었다. 각종 최신형 가전제품들이 시중가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에 중고나라 게시판에 올라왔다. ㄱ씨는 OLED TV는 360만원, 에어컨 165만원, 냉장고는 250만원에 판매한다고 홍보했다. 세탁기는 85만원에 팔았다. 그러나 그는 돈만 챙기고 물건은 보내지 않은 채 도주했다.

일부 피해자 가운데는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도 있었다. 피해자 안모씨는 “신혼가전을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하고 싶어 중고나라를 찾아보다 구매하게 됐다”면서 “그러나 돈만 송금하고 제품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1500여만원을 ㄱ씨에게 보냈다. 심지어 현직 경찰관도 ㄱ씨에게 당했다.

이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ㄱ씨가 너무나 정직하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ㄱ씨는 실제 국내 백색가전 분야에서 상위권을 다투는 대기업 소속 연구원이었다. 그는 거래 성사 전 사원증을 목에 건 자신의 얼굴을 거래자에게 전송했다. 심지어 재직증명서 원본까지 촬영해 보냈다. 인감증명서와 주민등록증, 명함도 전송했다. 그래도 끝까지 의심을 놓지 못한 일부 거래자들은 명함에 적힌 사무실 번호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면 ㄱ씨가 항상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ㄱ씨에게 의심을 품는 피해자는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중고나라를 통한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시점에 물건을 받은 사람도 일부 있었다. 이 역시 ㄱ씨가 일부 대리점을 속여 거래자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ㄱ씨는 ㄴ전자 직영대리점에 전화를 걸어 “내가 ㄴ전자 선임연구원인데 제품을 먼저 배송해 주면 곧바로 대금을 지불하겠다”고 속였다. 일부 직영대리점은 전자제품 12점을 ㄱ씨가 요청한 주소지로 배송하고 대금을 받지 못해 2700만원의 금전적 피해를 입기도 했다. 사기를 치기 위해 또 다른 사기를 친 셈이다.

ㄱ씨의 수법은 ‘출고시점이 늦어지고 있다’며 배송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출고가 늦어지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곧 배송할 것이라며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속였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중고거래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한 일부 피해자들이 모여 지난해 8월 ㄱ씨를 ㄴ전자에 신고했다. 그리고 직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ㄴ전자가 피해를 보전해달라고 요구했다. ㄱ씨는 그러나 11월 20일 해고절차를 밟아 퇴사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도주했다. ㄱ씨가 미처 반납하지 못하고 남기고 간 리스 차량 안에는 사기계획이 적힌 명단이 찢긴 채 발견되기도 했다.

ㄴ전자는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절차를 밟았기 때문에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수만 명에 달하는 전체 직원 중 일부가 회사업무와 무관하게 범죄를 저질렀는데 회사에 관리책임을 물으면 어떻게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느냐고도 항변했다. 실제 ㄴ전자는 중고거래 피해자들로부터 신고접수가 된 직후 ㄱ씨를 상대로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ㄴ전자 관계자는 “신고가 접수된 이후 ㄱ씨를 불러 경위를 조사했고, 임의제출 형식으로 ㄱ씨의 계좌내역을 살펴본 결과 실제 피해자들로부터 입금된 내역 등을 발견하고 즉각 ㄱ씨를 업무에서 배제시켰다. 또 (회사 재산인) 노트북도 압수해 조사를 벌였다”고 말했다. ㄴ전자는 또 관할 경찰서에 ㄱ씨를 도박혐의로 고발했다. ㄱ씨가 사기를 쳤지만 회사가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고소는 불가능했다. ㄱ씨는 중고나라에서 사기를 벌이기 전 불법 스포츠 도박을 하다가 많은 빚을 진 상태였다.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결국 그 도박빚을 갚기 위해 중고나라에서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주간경향>과의 전화통화에서 “ㄱ씨가 현재 미국으로 도주한 상태지만 ㄱ씨의 비자로 미국에서 체류할 수 있는 최장기간은 3개월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게 될 것”이라며 “우선은 ㄱ씨를 붙잡는 데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적색수배는 걸어놓지 않은 상태다. 한 경찰 출신 변호사는 “통상 적색수배는 금전적 피해가 5억원 이상이어야 한다”며 “요즘은 경찰이 용의자에 대해 적색수배를 걸려고 해도 심사위원회에서 거부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판단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피해자들이 취합한 총피해액은 4억여원 수준이다.

피해자 제공

사기 빈번한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

중고나라는 총회원 수 2000만명에 하루 순방문자(UV) 수가 190만명에 달하는 초대형 네이버 카페다. 여기에서는 지금도 갖가지 사기들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흔하게는 구매자가 입금한 후 잠적하기부터 불량품을 팔고 자취를 감추는 방식까지 다양한 피해신고가 매일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하루에도 수십~수백 건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일부에서 사기행각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용자들이 만들어낸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라는 작명에 실소를 금치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사기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직거래(직접 물건과 돈을 주고받는 것)’가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직거래로 유도한 뒤 “잠깐 다른 곳에 와 있는데 택배로 보낼 테니 안전거래를 하자”고 제안, 피싱사이트를 통해 돈을 빼돌리는 신종 사기도 등장했다. ‘안전거래’는 물건을 사려는 사람이 네이버페이로 금액을 송금한 뒤 물건을 정상적으로 받았을 때 수취 확인 버튼을 클릭하면 판매자에게 판매금액이 전달되는 송금방식이다. 물건이 오지 않았을 경우 미리 작성한 환불계좌를 통해 송금한 돈이 돌아오기 때문에 꽤 많은 중고나라 이용자들이 이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가짜 URL(페이지 주소)을 설정, 사기를 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매자가 ‘NPay(네이버페이)’ 버튼을 눌러 구매 결정을 했을 때 새롭게 뜨는 창을 가짜로 설정, 구매자는 NPay 계좌에 안전송금을 한 것으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사기꾼의 계좌에 돈이 송금되는 방식이다. ‘피싱’의 한 유형이다. 경찰 관계자는 “의심되는 거래는 일단 하지 말고, 최대한 직거래로만 물건을 사고파는 게 좋다”고 말했다. 또 거래 전 ‘더 치트’ 앱 또는 사이트를 통해 사기정보(거래 전화번호)를 조회해볼 것을 조언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블로그 이미지

오사사

국내외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정보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