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죄를 뇌사시킨 대법원

입력 2018.01.03. 08:18 

[한겨레21] 진경준 무죄 판결한 대법원 비판 봇물… 
뇌물죄 새 기준 만들었다는 비난 속 이재용 등 국정농단 재판에 영향 우려

진경준 전 검사장은 2016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법조 비리 시리즈’의 서막을 열었다. 진 검사장이 그해 7월14일 검찰에 출석하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진경준(51) 전 검사장의 넥슨 ‘공짜 주식’이 뇌물이 아니라는 최고법원의 판결에 법조계 안팎에서 날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진씨는 2005년 대학 동기인 김정주(50) 넥슨 창업주로부터 넥슨홀딩스 비상장주식 1만 주(4억2500만원)를 공짜로 받았다. 당시 상승 가도에 있던 넥슨 주식은 일반인에겐 문턱이 높은 우량주였다. 이듬해 진씨가 넥슨 주식을 처분하고 넥슨재팬 주식으로 갈아타면서 ‘대박’의 문이 열렸다. 2011년 상장으로 넥슨재팬 주가는 껑충 뛰었고, 2015년 팔아치울 땐 진씨 수중에 126억원이 남았다. 진씨는 또 10년 동안 김씨로부터 제네시스 차량과 가족여행 경비 5천여만원을 지원받았다.

직접 수사 안 했으니 대가성 없다?

진씨는 대법원 판결까지 오는 동안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1심은 공짜 주식을 ‘선물’로 판단했다. 돈이 오갈 때 진씨가 넥슨 현안과 관련된 사건을 맡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럴 개연성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재판부는 두 사람 사이를 ‘지음(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 관계’로 규정했다.

하지만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공짜 주식을 장래를 대비한 ‘보험성 뇌물’로 인정하고, 검사의 직무 범위도 폭넓게 해석했다. 개별 사건으로는 공소시효(10년)가 지난 주식매수대금 보전금 부분도 이후 범행과 포괄적 범죄로 엮어 유죄로 판단했다. ‘친구 사이라도 스폰서 관계는 유죄’란 취지였다. 다만 넥슨재팬 주식으로의 전환은 “주주의 지위에서 취득한 기회”란 이유로 무죄로 봤다.

대법원 1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14쪽짜리 짧은 판결문으로 항소심을 깼다. 대법원은 뇌물죄의 구성 요건인 직무관련성과 대가성을 좁게 해석했다. “금품이 오간 때에 김씨나 넥슨이 수사를 받긴 했지만 사안 자체가 매우 경미했으며, 김씨 사업이 진씨의 직무 범위에 속할 정도의 현안이 있지도 않았다”는 이유를 댔다. 진씨가 김씨 사건을 직접 수사하지 않은 이상 대가성이 없다는 논리다. 이를 두고 고법의 한 판사는 “넥슨은 당시 공격적으로 사업을 하면서 고소·고발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고 김씨 스스로 그런 우려 때문에 돈을 건넸다고 인정했는데, 이보다 더 구체적인 현안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이젠 ‘대가성’ 대신 ‘구체적 현안성’을 뇌물죄의 구성 요건으로 봐야 할 판”이라고도 지적했다.

대법원은 김씨가 향후 자신과 회사에 닥칠 수 있는 수사에 대비해 현직 검사를 꾸준히 금전적으로 ‘관리’했는데도 “막연한 기대감”에 불과하기 때문에 직무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이는 “진씨가 검사란 직무와 관련해 금전을 받았으면, 개별적 직무와 대가 관계까지 인정되지 않더라도 뇌물죄가 성립한다”며 유죄로 판단한 2심과 극명히 배치되는 논리다.

대법원이 검찰 조직의 특수성을 살피지 않은 채 검사의 직무 범위를 협소하게 판단했다는 비판도 따른다. 2심은 검사의 직무 범위를 “(범죄 수사 등) 법령상 인정되는 일반적인 직무”로 더 폭넓게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진씨에겐 필요시 수사할 수 있는 일반적 직무 권한이 있었다”면서도 “실제 진씨가 받은 청탁은 직무 권한 범위 내 사건에 대한 청탁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두고 한 판사는 “검사는 동료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도 수사 개시나 무마를 도모할 수 있다. 검사장까지 오른 진씨는 직무 범위가 더 넓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인과 공무원 유착 면죄부

진씨는 주식 취득 당시 검찰 인사를 맡는 법무부 검찰국에서 근무했다. 당장 수사 지휘·감독 체계에 포함되진 않아도, 인사나 사무 분담으로 수사에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다. 주식 취득 전후엔 금융정보분석원(2002~2004년)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2009~2010년)을 지냈다. 김씨에게서 제네시스 차량과 여행경비를 꾸준히 지원받던 시기와 겹친다.

대법원은 공여자의 진술도 까다롭게 판단했다. 김씨는 1·2심 법정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진씨가 주식매입자금을 갚지 못했지만) 검사라서 돌려달라고 하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검사는 힘이 있다. 검사라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사건이 있을 때 알아봐줄 수도 있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김씨는 진씨에게 잘 보이면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다거나 손해를 입을 염려가 없다는 정도의 막연한 기대감에서 이익을 공여했고, 진씨 역시 이를 짐작하면서 수수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대법 판결로 진씨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장 시절 한진그룹 내사 사건의 종결 대가로 처남에게 147여억원의 용역을 주도록 한 혐의(제3자 뇌물)만 유죄로 인정됐다. 진씨가 직접 수사를 지휘한 사건이다.

대법 판단대로라면 앞으로 수사나 재판, 세무조사 등을 대비해 판검사나 세무공무원 등에게 건네지는 ‘스폰형 금품’은 처벌하기 어렵게 된다. 서울 지역의 한 판사는 “임박한 현안이 없거나 직무관련성이 불투명하다고 주장하면 어지간해선 뇌물죄로 처벌하기 어려워진다. 기업인과 공무원의 부적절한 유착에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고 꼬집었다.

뇌물죄의 새로운 지표 되나

뇌물 사건을 많이 맡는 하급심 판사들은 곤혹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 법원은 통상 공여자의 자백에 상당한 신빙성을 부여해왔다. 자백하면 본인도 처벌받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진술한 만큼 신빙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방법원의 한 판사는 “대법원이 공여자의 완전 자백에 가까운 진술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으로 뇌물 재판에서 무엇을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으로 삼아야 할지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법조계에선 진씨 판결이 뇌물죄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당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국정농단’ 사건의 뇌물 재판에 대한 하급심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대가성 없이 일정 금액 이상을 수수한 공무원에게는 부정청탁금지법을 적용할 수 있지만, 법정형 상한이 징역 3년이라 최대 무기징역(수뢰액 1억원 이상)까지 처해지는 뇌물죄보다 형량이 낮다.

법원으로선 무엇보다 지난해 ‘법조 비리’ 이후 법조계의 자정 능력에 대한 국민의 마지막 기대를 외면했다는 비판이 가슴 아프다.

현소은 <한겨레>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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