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의 성폭행. 15년 만에 악마를 만났다"

맹미선 입력 2018.08.21. 07:25 수정 2018.08.21. 10:45

체육계 성폭력 고발한 테니스 선수 출신 김은희 씨


테니스 선수 출신 김은희 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던 2001년 7월부터 약 1년간 코치에게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이듬해(2002년) 한 학부모의 신고로 학교와 교육청에 피해 사실이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뽀뽀'가 스킨십의 가장 강도 높은 단어였던 초등학생 김 씨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가해자는 성추행 혐의로 사직 처리됐지만 다른 여러 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이어갔다.

2016년, 김은희 씨는 한 대회장에서 자신을 성폭행했던 코치와 우연히 마주친다. 가해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버젓이 시합에 출전했다. 김 씨는 사건이 벌어진 지 15년이 지나고 나서야 코치를 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체조협회임원 김OO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체육계 성폭력 문제의 원인 분석과 해결방안 모색을 위하여' 토론회를 주최했다.

자신을 "약 한 달 전까지 형사 재판에 나섰던 피해 당사자"라 밝힌 김은희 씨는 '성폭력 관련 체육계 전반의 신고 시스템'을 주제로 발표에 나섰다.

김은희 씨는 대학교 3학년인 2012년에야 자신이 당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입 밖에 꺼냈다고 했다. 조두순 사건으로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 공소시효 법안이 개정됐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코치를 고소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렵게 상담을 거쳐 경찰서까지 찾아갔지만 "증거가 부족해서 어렵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김은희 씨는 2016년 가해자와 우연히 마주치고 나서 다시 고소를 결심하게 됐다. 조두순 사건, 도가니 사건, 나주 성폭행 사건 등을 홀로 꼼꼼히 검색했다. 김 씨는 "당시 광주여성의전화, 해바라기센터,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 등 4개 기관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적극적인 도움을 준 기관이 없었다"고 했다.

김은희 씨는 "'이길 수도 없는 사건을 왜 다시 꺼내냐'는 한 기관 담당자의 말에 '고소장을 접수해서 가해자를 조금이라도 괴롭힐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위안이 될 것 같다'고 답했지만 담당자는 침묵으로 방관했다"고 했다.

김은희 씨는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인권센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스포츠비리신고센터에도 각각 신고 메일을 보냈다. 메일을 보낸 지 며칠이 지나도록 수신 확인이 되지 않았다. 김 씨는 "담당 조사관이 배정되는 데만 보름이 걸렸다"며 "만약 지금 당장 성폭력을 당한 상황이었다면 기관의 답변을 기다리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10년처럼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희 씨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도, 돈도 없이 고소를 준비하며 이들이 '누구를 위한 기관인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기관인지'를 끊임없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 씨는 "스포츠인권센터는 가해자 징계권을 가진 대한체육회 산하 기관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양 당사자 사이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으며 "피해자는 혹여나 가해자가 신고 사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신고 자체를 꺼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법원은 1심에서 김 씨를 성폭행해 외상 후 스트레스를 앓게 한 강간치상 혐의로 가해자 코치에게 징역 10년형과 12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를 선고했다. 지난 7월 26일 상고심 항소가 기각되며 코치에게 징역 10년형이 확정됐다. 최초 고소장을 작성한 지 꼭 2년만의 일이었다.

김은희 씨는 "지난 2년간 100년을 살아도 겪지 않았을 고통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합의로 사건을 종결하고 재판을 포기할까 수없이 고민했다. 다만 '15년간 신고를 하지 않아 발생한 또 다른 피해의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생각이 김 씨를 붙잡았다.

김은희 씨는 "'반드시 승소해서 다른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 사례를 만들겠다'는 다짐 하나로 시작한 일이기에 외로운 싸움을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몇몇 피해자들을 개인적으로 돕고 있다는 김 씨는 "이미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피해자를 법적, 행정적으로 철저히 지원하는 것이 스포츠인권센터, 스포츠비리신고센터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김승규 문화체육관광부 체육정책과 과장은 "관리 당국 관계자로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라며 "접수된 신고 메일을 즉각 열어보지 않은 근무 태만 사실은 파악할 수 있는 선까지 확인해보겠다"고 말했다. 이병진 대한체육회 감사실장은 "대한체육회뿐만 아니라 국회, 정부 차원에서 협업해 극복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한편, 플로어 토론에서는 현재 문체부 스포츠비리신고센터,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주종미 호서대학교 체육전공 교수는 "스포츠비리신고센터가 지금도 운영이 되고 있는 것이 맞느냐"며 "운영 확인차 전화를 했지만 며칠째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정희준 동아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도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몇 차례 전화를 해봤지만 제대로 된 회신이 오지 않았다"며 "관련 기관 담당자가 피해 접수 업무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사진=aslysun/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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