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정우성, '난민 발언' 후 첫 인터뷰 "세계는 한국이 예멘 난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볼 것"

박주연 기자 입력 2018.06.30. 06:00 수정 2018.06.30. 10:16

[경향신문] ㆍ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배우 정우성씨

배우 정우성씨가 지난 27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정씨는 제주 예멘 난민 문제에 대해 “우리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난민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윤중 기자

“(제주 예멘 난민 관련) 이야기를 해야겠답니다.”

지난 24일 오후 10시 무렵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배우 정우성씨(45) 측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앞서 20일이었다. 정씨는 당시 악플에 시달리고 있었다. 20일 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촌 사진과 함께 난민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호소하는 글을 올린 게 공격의 빌미가 됐다. 제주도에 도착한 549명의 예멘 난민 문제가 사회적 논쟁으로 급부상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제주도 난민 신청 허가를 반대하는 청원참여자가 50만명을 넘어섰고, 30일 저녁 서울 세종로에서는 난민 반대 집회가 예고돼 있다. 정부는 29일 “한국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난민보호 책무를 이행해야 한다”면서도 “난민제도를 악용하는 일이 없도록 난민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7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정씨를 만났다. 그는 전날 제주도에서 개막된 제주포럼에 참석한 후 막 서울로 올라온 길이었다. 맨얼굴에 수수한 차림으로 나온 정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허심탄회하게 제주 예멘 난민 문제 등에 대해 생각을 밝혔다. 그는 2014년 네팔을 시작으로 남수단(2015), 레바논(2016), 이라크(2017)에 이어 지난해 12월엔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에 있는 로힝야 난민촌을 방문했다. 매년 5000만원의 후원금도 난민기구에 내고 있다.

내전 속 성인 남성 강제 징집 잦아 거부 땐 위협…결국 고국 땅 탈출

- 지난 20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과 사진 때문에 비난 댓글이 쏟아졌죠. 제주도 난민 신청 허가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나 30일로 예고된 집회를 감안하면, 대중의 인기로 살아가는 배우라는 직업의 특성상 이 인터뷰가 부담되지 않나요.

“제가 먹고사는 일에 악영향이 없게 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대해 생각이 있어도 침묵하는 것은 방관자가 되겠다는 거잖아요. 대중의 사랑으로 얻은 명성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측면에서도 옳지 않아요. 우리 사회와 시민들의 의식을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소신을 밝혀야죠. 더구나 난민 문제인데,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일해온 제가 함구할 순 없어요.”

- 웹툰작가 윤서인씨의 글을 비롯해 반응 댓글들이 매우 험악하던데요.

“제주도 난민 신청 허가를 반대하는 의견도 존중받아야 해요. 하지만 의사표현 방식도 중요한 것 같아요. ‘네가 뭔데 함부로 지껄이냐’는 식의 격앙된 감정적 공격으로는 발전적 논의로 이어질 수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상대방에게 전달하려면 좀 더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한데, 일부는 너무 감정적으로 이 사안을 따지고 드는 게 아닌가 싶어요.”

- 일부 누리꾼은 정우성씨의 경우 친선대사로 잠깐씩 해외의 난민촌을 방문할 뿐이고, 현실에서는 부유하기 때문에 난민과 직접 부대낄 일이 없어 이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진 불안감은 이해해요. 하지만 난민이나 난민협약, 난민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지금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정우성씨가 2015년 5월 남수단 북부 유니티 주에 위치한 아중톡 난민촌에서 어린이들과 장난을 치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 어제 포럼 참석차 제주도에 내려간 김에 예멘 난민들도 직접 만나봤습니까.

“만나뵙고 싶어 유엔난민기구에 요청했어요. 만찬 시작 직후 조용히 빠져나와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한 그들 동포의 집에 잠시 머물고 있는 여섯 분의 예멘 난민을 만났어요.”

- 만나보니 어떻던가요.

“제가 그동안 보아온 난민들과 똑같죠. 온라인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면 많은 분들이 난민에 대한 획일화된 이미지를 갖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러나 정치적 상황으로 갑자기 난민이 됐다고 해서 모두가 헐벗고 교육수준이나 개인이 지닌 인생의 역사성이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여섯 분은 예멘에서 모두 전문직 종사자였어요. 기자였거나, 프로그래머였거나, 일렉트로닉 엔지니어였고, 예멘 전 국가대표 사이클선수도 있었어요.”

- 그러고보면 제주 예멘 난민들이 나이키 등 유명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착용했다거나, 고가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는 이유로 가짜 난민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꽤 있더군요.

“중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차림이에요. 스마트폰은 그분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도구이고요.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자신의 안녕을 가족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니까요.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각종 정보도 얻을 수 있고요. 그래서 식사는 포기해도 스마트폰을 포기하는 난민은 없어요.”

- 제주도 예멘 난민이 젊은 남성이 다수라고 하는데 만난 분들은 왜 고향을 떠났다고 하던가요.

“정부군과 반군 간 내전이 계속되면서 성인 남성들은 정부군이나 반군에 우선적 징집 대상이에요. 자기가 원하지 않는 전쟁임에도, 징집되면 살인을 해야 하고 자신의 생명도 위협받죠. 그런데 징집을 거부하면 가족을 볼모로 위협을 가한다고 해요. 살인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가족의 안전,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예멘을 탈출했다고 해요.”

유엔 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씨가 2016년 3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의 시리아 난민 비공식 거주지를 방문했다. 난민촌 어린이가 정우성씨에게 귀엣말을 속삭이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 정우성씨는 정부가 지난 1일부터 제주도에 비자 없이 들어올 수 없는 국가에 예멘을 추가한 것이나, 제주 예멘 난민의 출도 제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인 건가요.

“비자로 난민 입국을 통제하겠다는 것은 난민협약 정신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난민이 어느 나라에 가서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결과를 초래할 위험을 내포하니까요. 하지만 이번 결정은 놀란 지역 민심을 안심시키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니 한쪽의 관점으로만 말할 수 없기는 해요. 우리 모두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는 거죠. 출도 제한의 경우도 이미 정해진 현실인 만큼, 최대한 신속하게 난민 심사를 진행해야겠죠.”

난민에 대한 불안감 이해하지만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해선 안돼

- 예멘 난민에 대해 한국인들이 경계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인 것으로 보여요. 무슬림 난민을 받아들인 유럽 사례를 들며 테러·성범죄 등 각종 범죄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고, 온라인에서는 관련 가짜뉴스도 돌고 있어요.

“극히 일부 극단주의 성향의 무슬림들 이야기를 전해듣고 공포를 느끼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아요.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의 걱정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극히 소수의 사례로 난민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하며 경계하는 것은 난민을 우리와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또 다른 차별군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제주 예멘 난민의 상당수가 취업을 위해 들어온 가짜 난민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한 보수언론은 ‘난민 브로커’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예멘 난민들의 제주 도착 전 SNS로 한국 내 취업을 조언했다는 보도도 했어요.

“브로커는 난민이 발생하는 지역이면 어디에나 있어요. 왜냐하면 난민들이 정착하려는 나라의 정보에 캄캄하니까 이들을 통해 해당 국가의 법규나 난민 신청 절차 등 다양한 정보를 얻죠. 선의의 브로커이면 괜찮은데 난민을 속여 인신매매하는 나쁜 브로커도 있어요.”

정씨는 2014년 유엔난민기구 명예사절로, 이듬해 세계에서 10번째로 친선대사로 임명됐다. 친선대사는 현재 그를 포함해 21명. 할리우드 스타 앤젤리나 졸리는 특사 자격으로 활약 중이다. 정씨는 명예사절 제안을 받은 후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 2014년 명예사절 제안을 너무 빨리 수락해 기구도 놀랐나 보던데요.

“제안이 반가웠거든요. 지구촌 사람들은 물론, 제게 많은 것을 부여해준 우리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미션을 수행하면 할수록 내가 엄청난 일을 맡았구나 느꼈고 책임감이 커졌어요. 언제나 난민촌으로 떠나기 전 떨리고 무섭죠. 스스로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됐니? 준비됐어?’ 하고 자문해요.”

- 무섭다니요. 뭐가요.

“누군가의 입장과 상황을 대변하는 일이니까요. 거기에는 저의 감정이 개입돼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난민 관련 인터뷰를 할 때는 자기검열을 수시로 하죠. 난민촌에 가면 많은 생각이 교차해요. 인류는 사랑이 아니라 파괴를 위해 태어난 것인가, 왜 많은 이들이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야 하나, 종교는 뭘까 같은…. 때론 무력감도 들어요. 결국 분쟁을 당장 없앨 수 없다면 세계적으로 공감과 이해를 확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죠.”

정우성씨가 2017년 6월 이라크 북부 함다니야의 국내 실향민 캠프 하산샴U3에서 만난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 2014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네팔·남수단·레바논·이라크·방글라데시의 난민촌을 다녀왔죠. 가면 얼마나 머물고, 어떤 활동을 하나요.

“직항이 없는 곳이 많아 비행만 24시간 한 적도 있는데, 현지 체류는 2박3일 정도예요. 한 번 가면 그곳 난민캠프 서너 곳을 방문해요. 보통 한 캠프에 수만명의 난민이 있는데, 제 역할은 이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거예요. 하지만 난민들은 스스로 왜 이곳에 있는지 혼란스러운 데다 신분 노출을 두려워해 만남을 쉽게 허락하지 않아요. 저는 되도록 많은 분들을 만나려 노력해요.”

- 난민촌에서 굉장히 적극적으로 일한다고 들었어요. 유엔난민기구 직원들이 동료로 착각할 정도라고 하던데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착각 안 했으면 좋겠어요. 진짜로 저를 직원 취급해요(웃음).”

- 난민촌이라면 잠자리와 음식, 샤워시설 등 모든 게 열악할 텐데 많이 불편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제게 문제가 안돼요. 그런 걸 따지면 애초에 일을 맡지 말아야죠. 난민촌에 가면 실제로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쫄쫄쫄 나오는 일이 태반이지만, 저 씻는 거 귀찮아해요(웃음).”

다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해 이들은 ‘그 날’ 희망 품고 살아가요

- 난민들이 살아가는 힘은 뭐라고 생각해요.

“희망이오. 다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고 그날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그 희망으로 살아요. 또 자신들의 자녀들은 지금보다 나은 미래에 살 것이라는 희망도 품죠. 이야기를 듣다보면 아,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한지 새삼 깨닫게 돼요.”

- 특히 인상적이었던 풍경이 있나요.

“남수단에 갔을 때 내전 당시 사용한 비행기 격납고 같은 곳에 만든 식량 배급소가 있었는데 그 앞에 구름처럼 장사진을 친 난민들의 모습이 충격적이었어요. (휴…,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진짜…, 삶을 잇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는 삶의 무게를 느꼈어요. 또 캠프마다 신생아 분만소가 있는데, 찜통 같은 날씨와 혼란 속에서도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나는 아기들의 모습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요.”

그는 “해외 난민촌을 다녀온 후에는 약 한 달간 현지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전하고 난민에 대한 관심을 호소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세계는 한국과 한국인이 제주 예멘 난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 세계 각국이 난민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힘을 갖고 목소리를 얻으려면 이러한 난민 문제를 분담할 수 있는 국가임을 보여줘야 해요. 시민의식이 그런 국가를 만들 수 있어요. ‘자국민의 인권보다 난민의 인권이 중요하냐’는 이분법적 비교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난민의 인권도 중요하니 보호하자는 거예요.”

정우성씨가 2017년 12월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탈출한 로힝야족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8 월25 일 폭력 사태 이후 62 만 명이 넘는 난민이 유입되면서 이곳 난민캠프는 자원 부족과 난민 보호에 대한 다양한 요구에 직면해 있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어릴 적 ‘좋은 아버지 되기’가 소원 연애하고 있느냐는 질문엔… “노코멘트”

시간을 거슬러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어렸을 때 가족이 서울 사당동 달동네 철거촌을 이리저리 옮겨다녔을 만큼 몹시 가난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어쩌면 이런 불우한 성장배경이 난민과 같은 소외된 이들을 향한 그의 관심과 공감력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됐다.

-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리어카에 모터 달린 가위를 가는 기계를 싣고 다니며 가위를 갈아주는 일을 하셨어요. 하루 100~150개 정도의 가위를 갈면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어요. 제 위로 형과 누나가 한 명씩 있는데, 어머니가 자주 막내인 제 손을 잡고 의류공장을 찾아다니며 외상 수금을 하셨어요.”

- 어린 정우성은 어떤 아이였나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되게 조용하고 상상을 많이 하는 아이였어요. 어린 시절 기억이 많지는 않은데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하교 후 집에 아무도 없으면 부엌문 쪽창을 넘어서 방으로 들어갔어요. 남의 집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살았는데 어머니가 분식집에 일하러 가시면 제가 쪽창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걸 아시니까 현관문이나 마찬가지인 부엌문을 자물쇠로 잠그셨거든요. 저는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바깥의 아이들이 뛰어놀며 내는 소리를 들었어요. 지금도 그 소리와 이미지가 선명하게 박혀 있어요.”

- 왜 아이들과 같이 놀지 않고요.

“아이들과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했어요. 대부분을 혼자 지냈어요.”

- 서울 종로에 있는 경기상업고등학교를 1년 만에 중퇴했던데, 상고를 간 이유가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이었나요.

“공부도 재미없었고, 상고를 나오면 은행 말단직원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갔어요.”

- 중퇴한 이유는 뭐였나요.

“저의 권유로 같이 경기상고에 입학한 친구가 선배들과 엮인 어떤 사건으로 인해 먼저 자퇴했어요. 친구에게도 미안하고 혼자 뭔가 쓸쓸한 느낌도 있고 학교생활도 막막하고 아이들도 보기 싫어 그만뒀어요.”

- 부모님이 쉽게 허락하셨나요.

“어머니께 다른 얘기 없이 ‘나, 학교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교무실 풍경이에요. 담임 앞에서 저도 고개를 숙이고 있고, 어머니도 죄인처럼 앉아 계셨어요. 학교에서 나온 어머니와 저는 효자동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탔고, 제가 먼저 방배동 카페골목에서 내렸어요.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옷가게가 그곳에 있었거든요. 멀어지는 버스를 보며 어머니께 많이 미안했어요.”

- 중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계속했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겠어요.

“중3 겨울방학 때 서문여중고 앞 햄버거 가게에서 알바를 했어요. 중학생이라고 하면 일을 안 줄까봐 말을 안 했어요. 당시 이미 제 키가 183㎝였거든요. 고1 여름방학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는데 여고생들이 저를 재수생 오빠로 알고 찾아오면서 매상이 엄청 올랐어요(웃음).”

- 청소년기에 가난은 어떻게 다가왔나요.

“크게 불편하거나 억울하지는 않았어요. 학교에서 부모님 지위나 사는 동네에 따라 교사들이 보이지 않는 차별을 한 것은 탐탁지 않았지만요.”

- 한국 사회는 학벌사회라 하고 학연에 대한 집착도 크잖아요. 유명 연예인인 만큼 마음만 먹었다면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졸업장쯤은 쉽게 딸 수 있었을 텐데요.

“검정고시 통과를 도와줄 테니 자기 대학에 오라는 제안을 받기는 했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밖에서 배우는 게 더 많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물론 제도권 안에서 또래들과 어울리며 소통하는 기회를 상실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주관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의 결과들이 제도권에 속해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강윤중 기자

- 청소년기부터 배우를 꿈꿨던 거죠.

“음…, 절박하지는 않았어요. 그냥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학교를 자퇴한 후 모델센터를 다니며 모델 일을 시작했어요. 지상파 방송3사의 탤런트 공채 시험에도 응시했지만 고교 중퇴 학력 때문에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낙방했어요. 단막극 알바도 하고 모델 일도 하다가 아는 형이 영화음악 제작자라며 매니저를 소개해줬는데 그분이 정훈탁씨(현 IHQ 대표)였어요.”

- <구미호>(1994)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SBS 창사특집 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1995)로 주목을 받았어요.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은 영화 <비트>(1997)였고요. 지금까지 3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뭐예요.

“모든 작품에 애착을 느끼죠. 특히 <비트>는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멋진 수식어를 선물해준 소중한 작품이에요.”

- 2016년 11월 영화 <아수라> 팬 단체관람 현장에서 영화 대사를 바꿔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외치고, 지난해엔 세월호 다큐 내레이션을 맡았죠. 또 KBS 파업 중에 KBS1 <뉴스집중> 생방송에 출연해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일침을 날렸고요. 연예인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고, 정권이 바뀌면 피해를 입기도 하는데 부담을 안 느낍니까.

“정권이 바뀐다고 피해를 입는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또 후퇴하는 거예요. 그러지 않는 세상이 돼야죠. 한국은 독재정권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발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암묵적 압력이 이뤄졌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정치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죠. 저는 국민이 부조리에 대해 발언해야 한 나라의 정치도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박근혜 정부 때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도 이름이 올랐었죠. 이유를 아나요.

“왜 올랐는지는 모르는데 누군가 저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해서 정보를 올렸나 싶어 섬뜩함을 느꼈어요.”

- 정치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은데 주로 어떤 창구를 통해 시사 정보를 얻나요.

“주로 유튜브를 통해 많은 정보를 얻어요. 제가 궁금한 사안에 대해 정보를 찾아 들어가는 식이죠. 유튜브를 통해 관심 사안에 대한 강의도 듣고요. 그리고 온라인으로 신문·방송 보도도 꾸준히 보죠.”

아침에는 라디오 시사 프로 청취 시간 날 땐 혼자 걷거나 멍 때리기

-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뭔가요.

“물 마시고, 라디오를 틀어요.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들으면서 식사해요. 그다음에는 배우의 일을 하죠. 관련 스케줄이 있으면 나가고 시나리오 작업할 것 있으면 같이 하고요. 요즘도 작가들과 같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작품이 있어요. 제가 연출이나 제작을 맡을 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아직 공개하기는 일러요.”

- 책 읽는 것도 좋아합니까.

“좋아하는데, 요즘엔 진짜 못 읽었어요. 무조건 많이 읽어야지 해요. 책을 오랫동안 안 읽었더니 불안해져서요(웃음). 제게 지인이나 팬들이 책 선물을 많이 보내주세요. 장르는 소설, 에세이, 시집, 철학서 등 다양해요. 저는 철학서가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요.”

- 배우로 데뷔한 지 25년이고 나이로는 벌써 40대 중반이에요. 40대 중반의 나이는 정우성씨에게 어떻게 다가오나요.

“나이를 의식하고 살지는 않아요. 그러나 중요한 시기인 것은 확실하죠. 잘 나이를 먹어야지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시기인 것 같아요. 꼰대는 되기 싫고, 도전의식을 버릴 수는 없고, 안정된 저만의 삶만 추구하고 싶지도 않아요. 옆에서 보면 불안한 40대가 아닐까요?”

배우 정우성씨가 지난 27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 2008년 46억2600만원의 거액을 지인에게 사기당했죠. 당시 사기당한 돈을 조금이라도 회수했나요.

“아니요.”

- 보통 사람 같으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극복하기 힘든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을 탓하지 말자고 생각했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도돌이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다만 앞으로 더 잃지 않으려면 안일하거나 미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당시 제 생활과 품위 유지를 위해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요.”

그는 솔직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전혀 꾸밈없이 답변을 이어갔다. 때론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기다가 한 템포씩 쉬었다가 말했다.

- 스스로 인간 정우성과, 배우 정우성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도, 배우로서도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배우는 타인의 인생을 표현하는 직업이에요. 배우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완성돼 있느냐에 따라 연기의 질도 달라진다고 믿어요. 그러니 제가 더 바르게 잘 살아야겠죠.”

- 일상에서 시간이 날 때는 주로 뭘 하나요. 지인들과 술자리를 갖나요.

“술 마시고 놀기 위한 만남을 가진 지는 오래됐어요. 여유시간이 있으면 혼자 걷거나 혼자 멍 때리기를 해요. 어릴 적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죠. 밤어둠이 내려도 불도 안 켠 채 가만히 앉아서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들어요. 그러고 있으면 1시간쯤은 금방 흘러요.”

- 절친이 배우 이정재씨죠. 삼성동의 같은 빌라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아요. 자주 만나나요.

“서로 약속을 해야 보지 자주는 못 봐요. 술도 밖에서 같이 식사할 일이 있을 때 반주 정도로 곁들이고요. 물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귀가 후 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그 집이나 제 집에서 보기도 해요.”

- 정우성씨는 최근 수년간 연애 스캔들이 없던데, 연애는 하고 있습니까.

“음…, 노코멘트할게요(웃음).”

-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나요.

“사실 어려서부터 제가 진짜 되고 싶은 것은 좋은 아버지였어요. 일찍 결혼하고 싶었죠. 20대 후반에는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보니 안됐고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됐어요. 지금 조바심은 느껴요. 그런데 배우라는 제 직업이 좋은 아빠를 떠나서 좋은 남편이 될 수 있는가, 워낙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는데 지금 상태의 스케줄이라면 가능한 일일까, 요즘 생각이 약간 복잡해요.”

- 앞으로 어떤 삶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당장 내년 스케줄은 있지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겠다는 거시적 계획은 없어요. 그보다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세상을 대하는 태도나 인간관계에서 제가 온당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봐요. 그런 자세가 제 삶을 만들어줄 것 같아요.”

인터뷰는 2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헤어진 후에도 그는 카톡으로 인터뷰 과정에서 표현이 미흡했다고 여긴 부분들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내왔다. 난민 문제에 대해 그가 느끼는 묵직한 책임감의 무게가 와닿았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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