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들 싸움에 우리만 빨간 줄" 육탄전에 보좌진들 떤다

현일훈 입력 2019.04.29. 06:01 수정 2019.04.29. 09:34

               

“영감님들 싸움에 우리만 ‘빨간 줄’ 생기는 게 아닌지….”

28일 오후 여의도 국회 본청 4층. 다시 ‘육탄전’을 대비 중인 한 보좌진이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했다.
선거법과 검찰개혁 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지정을 두고 벌어진 25~26일의 여야 간 고성과 욕설, 몸싸움의 중심에는 국회의원의 보좌진들이 있다. 여야 지도부는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며 맞불식 고발전(戰)을 진행 중이다. 물리적 충돌을 직접 치른 보좌진들의 ‘남모르는’ 걱정은 커지고 있다.

익명을 원한 이 30대 남성 보좌진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영감님들 싸움에 보좌진 등만 터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몸빵’한 보좌진들만 나중에 법정에 서는 게 아니냐고 가족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고 토로하면서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이 지난 26일 새벽 여야4당의 수사권조정법안을 제출하기 위해 자유한국당 당직자들이 점거하는 국회 의안과 진입을 시도하면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연합뉴스]
실제로 국회 보좌진들도 자신들이 주로 형사 처벌 대상이 되는 게 아니냐는 말들을 한다. 여야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물리적 충돌의 선두에 섰기 때문이다. 국회법 165ㆍ166조(국회 회의 방해죄)를 어긴 '보좌 직원'은 공직선거법상 당연 퇴직 사유에 해당한다. 또 5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게 되면 5년간 채용이 불가능하다. 국회 회의 방해죄는 2012년 생긴 국회선진화법의 핵심 조항이다.
국회 보좌진들의 익명 게시판에는 육탄전에 가까운 몸싸움에 대해 걱정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여의도 옆 대나무 숲' 캡처]
이런 속사정은 보좌진의 익명 게시판인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주말 사이 게시판에는 “보좌진이 의원들의 사노비냐”, “혹 법적 문제가 되면 당신(의원)은 날 어떻게 보호해 줄건가”, “폭력에 동원하지 말자고 보좌진들이 성명서라도 내라” 등의 글이 올라왔다.
“어르신들이야 더 이상 아까울 것이 없겠지만 젊은 분들은 빨간 줄 하나에 인생이 발목 잡힌다”며 “청와대, 공공기관 임명직 공무원, 민간 기업체 어느 곳도 들어갈 수 없는 만년 이류가 될 것”이라고 쓴 글도 있었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한 비서관은 “냉정하게 말해 내년 총선(2020년 4월 15일)이 1년도 안 남았는데 모시고 있는 의원님이 당선될 지, 날 책임져 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선거제·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의 처리를 놓고 여야의 극심한 대치가 26일 새벽까지 이어진 가운데 법안 접수처인 국회 의안과의 문이 심하게 부서져 있다.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26일 “회의 방해가 아니니 (고발 압박에) 쫄지 말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야가 상호 고발전을 벌이면서 보좌진들도 덩달아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다.

특히 국회선진화법은 ‘반의사 불벌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죄)’가 아니기에 여야 지도부가 나중에 고소·고발을 취하해도 수사는 진행된다. 국회에서 만난 한 보좌진은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다”고 불안해 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28일 “회의 질서 유지를 방해하는 국회의원이나 보좌관, 당직자 모두 예외 없이 고발하겠다. 과거처럼 유야무야 끝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당도 지난 27일 폭력을 행사한 민주당 측 17명을 공동상해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은 “의원은 물론 당직자와 보좌관들도 예외 없이 고발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이 지난 26일 오전 국회 본청 의안과에 모습을 드러내자 자유한국당 의원과 관계자들이 집결하고 있다. [중앙포토]
물론 지금의 물리적 충돌이 여야의 ‘정치 부재’에서 촉발된 만큼 당 지도부나 의원들의 지시로 몸싸움에 나선 보좌진들은 선처를 받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법정에 서더라도 취업에 지장을 주는 ‘벌금 500만원’ 이상의 중형은 선고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아직 선진화법으로 처벌받은 의원이나 보좌진도 없다.

그러나 기동민 민주당 의원은 통화에서 “국회 근무자 시절인 2011년 한나라당(한국당 전신)이 법안을 날치기로 처리하려 해 이를 막기 위해 이회창 총재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았다가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았다”며 “지금의 보좌진 역시 홀로 외로운 법정 싸움하며 독박 쓸 수 있으니 불법에 동원되지 말라”고 말했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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