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말겠지" 日 깎아내리던 불매운동, 일냈다

이재은 기자 입력 2019.12.29. 06:01
                          
      
[2019이슈+]①일본 제품 불매 운동 촉발한 한일 갈등
/사진=임종철 디자인 기자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조치에 따른 한일 관계 경색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올해 하반기 우리 국민들의 애국심을 사로잡았다. 지난 7월부터 이어진 불매운동은 초기까지만 해도 금세 식을 거란 전망이 다수였지만 현재까지 활발히 이뤄지면서 전망이 뒤집혔다.

韓日무역전쟁, 그 시작
시작은 우리 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이었다. 지난해 10월30일, 한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춘식씨(99) 외 3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의 기업들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2005년 2월 이씨 등이 일본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뒤 13년8개월 만에 내려진 판단으로, 그동안 소송 당사자 4명 중 3명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신일철주금 측은 "이는 1965년 한일청구권·경제협력협정, 또 일본 정부의 견해와도 반한다"며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으며, 지금까지도 배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광복절인 15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광복 74주년 일제 강제동원 문제해결을 위한 시민대회 및 국제평화행진에 참석한 강제징용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이춘식 할아버지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2019.08.15./사진=뉴시스

일본 정부를 비롯 고위층 인사들의 입장도 신일철주금 측과 같다. 일본이 한국을 성장시켰으며 과거 협정 조약을 통해 문제들이 이미 해결됐는데, 한국이 일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는다는 식이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종의 보복에 나섰다.

지난 7월4일부로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들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에 반발해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관련 핵심소재 3종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강화 조치를 취했고, 8월엔 한국을 전략물자 수출시 절차상 우대혜택을 부여하는 우방국(화이트국가) 명단에서 빼버렸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논설위원은 "한국이 이만큼 풍요로운 나라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건 1965년 일본이 준 3억불 덕이며, 과거 한일 간 협정 조약으로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됐고 개인 보상도 했다. 이제는 한국 내부적으로 해결을 해야 하는데, 일본 기업에 대한 재산 압류 결정이 나왔다"면서 "(이번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는) 일본 정부가 계속 한국 내부에서 해결해 달라고 요구해 왔는데 전혀 대답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뜻에서 도발적인 처방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위기? 한국 국민 반발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초기엔 한국이 피해를 받는 듯 했다. 예컨대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에칭가스는 99.999% 이상의 초고순도여야하는데, 에칭가스를 만드는 국가는 일본 외에도 중국, 대만 등 여럿이지만 고순도 정제 기술은 일본이 가장 앞서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납품하는 일본 스텔라케미파·모리타가 세계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예상과 달리 피해는 한국만 입지 않았다. 반도체 생태계 전반이 어려워지면서 일본 기업들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은 중국에 공장을 세워 한국에 우회 수출하거나, 한국에서의 생산 방법을 찾는 등 자구책을 찾았다.

니혼게이자이는 "반도체용 레지스트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20~30%를 차지하는 도쿄오카공업은 최첨단 극자외선(EUV)용 레지스트를 한국 공장에서도 생산, 한국 기업에 납품하는데 최근 한국에서의 레지스트 증산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모리타(森田)화학공업이 연내 중국의 합작 공장에서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의 생산을 시작할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중국 공장이나 중국의 반도체회사 등에 납품하고, 요청이 있으면 한국에도 출하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은 반도체에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는 갑자기 한국 사회 전반에서 제일 큰 이슈로 거듭났다. 한국 국민들은 일종의 '소비자 운동' 차원에서 일본산 맥주, 일본 관광 등을 대상으로 한 전방위적 불매에 나섰다. 한국 소비자들 사이에선 '본때를 보여주자'거나 '불매 의지가 불탄다' 등의 의견이 대두됐다.

6일 오후 대구 달서구 대천동 유니클로 매장 앞에서 한 시민이 일본 경제 보복의 부당함과 일본 제품 불매 동참을 호소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19.07.06./사진=뉴시스

잠깐 스쳐가는 불매운동?
불매운동 초기만해도 일본에선 '이러다 말겠지'란 시각이 대부분이었다.

지난 7월11일 유니클로 일본 본사 패스트리테일링의 오카자키 타케시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제 불매 운동이 매출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사실이다"라면서도 "장기적으로 매출에 영향을 줄만큼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카자키 최고재무책임자는 이어 "우리는 정치적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한국에 뿌리 내린 것을 조용히 지켜나갈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구로다 논설위원도 불매운동을 폄하했다. 그는 "불매운동은 실제 행동보다는 인터넷에서 나타나는 반일 성향에 기반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면서 "남몰래 뒤에서 결의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난 지금 불매운동을 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싶어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 같은 소식은 오히려 한국 소비자들이 불매운동 열의를 불타게 하는 기회가 됐다. 온라인에선 "저런 식으로 한국 소비자를 호구 취급하는데도 구매하면 한국 사람 아니다"라거나 "대체제가 많다. 다른 것 소비하자" 등의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맥주. 2019.7.29/사진=뉴스1


불매운동은 수치로 나타났다. 지난 9월 일본산 맥주의 한국 수출은 99.9% 급감해 사실상 퇴출됐다. 한국에서 일본차량의 신차등록건수는 60% 감소했고, 지난 8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 관광객은 전년 동월보다 48% 줄었다.

조금씩 일본에선 앓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에게 의존했던 일본 지방 소도시를 중심으로 신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최근 일본정부관광국(JNTO)이 발표한 외국인 여행자 통계에 따르면 올해 11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전년 대비 65.1% 감소한 20만5000명으로 집계됐다. 동일본 대지진 직후인 지난 2011년 3월 당시 감소세(66.4%)와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황성운 주일한국문화원장은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된) 7월 이후 10월, 11월에 (한국인 관광객이) 빠져나갔다. 일본의 지역 관광 타격이 심각하다"며 "후쿠오카의 경우 외국인 관광객의 55%가 한국인인데 지금은 많이 오지 않아 타격이 있다. 지역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일 관계 개선을 요구할 정도"라고 말했다.

日 "한국이 먼저 책임있는 행동할 것"
경색국면이던 한일 관계는 우리 정부가 지난달 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일단 '조건부 유예'하면서 달라졌다. 일본 정부가 협조적으로 나오면서, 우리 산업통상자원부와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6일 도쿄에서 국장급 수출규제 관련 정책대화를 여는 등 수출 관리 문제를 추가로 협의해왔다.

지난 20일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중 반도체 소재 한 품목에 한정해 전격적으로 규제를 완화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날 '포토레지스트'를 수출 개별허가 대상에서 '특정 포괄허가' 대상으로 바꾼다는 내용의 통달(고시)을 발표했다. 통달엔 한국만이 속한 '리'지역에서 포토레지스트를 특정허가 방식으로도 수출이 가능하게 한다는 것으로, "포괄허가 취급 요령으로 정하는 조건을 충족한 기업의 해당 품목은 반복 계속적인 거래에 한해, 개별 거래마다 신청서를 제출할 필요가 없도록 수속을 변경한다"고 적혀있다.

이날 '일부 완화'에 대해 청와대 쪽은 "이번 조처는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한 것으로, 일부 진전으로 볼 수 있다"면서도 "수출규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으로는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즉 일본 정부가 다소간 우호적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큰 틀을 바꿀 근본적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난 24일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열린 제8차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와의 정상회담 때도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입장이 드러났다.

/AFPBBNews=뉴스1


아베 총리는 "한국 측의 책임으로 해결책을 제시해달라"며 "일본 기업자산 현금화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한국의 책임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며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를 한국 측이 만들도록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기조는 당분간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국민 대부분이 한일 관계 개선은 시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2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TV도쿄와 닛케이가 지난 20~22일 일본 18세 이상 남녀 957명을 대상으로 '일본이 양보할 정도면 한일 관계 개선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70%였다. 반면 '관계 개선을 위해 일본이 양보하는 건 불가피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불과 20%였다. 지난 8월과 10월, 11월 조사와 유사한 결과다.

이재은 기자 jennylee1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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