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어머니·누나·남동생·여동생까지 죽여놓고..배상않는 정부

박동해 기자 입력 2021. 02. 14. 08:04


거창양민학살 70주년..학살 인정됐는데도 정부는 보상 미뤄
21대 국회에도 법안 상정.."1세대 유족 죽기 전에 해결해야"
서종호 거창양민학살유족회 서울지회장이 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커피숍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1.2.4/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정월 초하루가 지나고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당시 아홉살이었던 서종호씨의 초가집 인근에는 무릎 높이까지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첩첩산중에 눈까지 내려 고요했던 시골 마을의 아침을 깨운 것은 낯선 군인들의 외침이었다. 무장을 하고 횃불을 든 채 들이닥친 군인들은 가족들을 내쫓고 집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해하는 가족들에게 군인들은 '3일 치 식량과 수저만 챙겨 마을 앞 논으로 이동하라'고 다그쳤다.

이제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게 된 서종호씨(79,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 서울지회장)는 1951년 2월 그날의 순간을 70년이 지난 2021년에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서씨는 불이 나는 와중에 '집안에 소들을 챙겨서 큰할머니(외증조할머니) 집 앞 대밭에 가져다 놓으라'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혼자 가족들과 헤어져 소들을 챙겼다. 그 시간이 부모, 형제들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는 것을 그때 서씨는 알지 못했다.

지난 4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다방에서 만난 서씨는 "대한민국, 아니 세계를 찾아봐도 순수한 양민을 이렇게 학살한 사건이 없었다"라며 70년 전 한 서린 기억을 털어냈다. '거창양민학살'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남동생 둘, 여동생까지 여섯 식구를 한번에 잃었다. 막내는 직전 해 겨울에 태어나 돌을 넘기지도 못한 갓난아이였다. 집도 모두 타버려 가족을 기억할 만한 유품 하나 남지 않았다.

군인들은 이날 서씨가 살던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마을 주민들을 인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면소재지가 있는 과정리로 몰아갔다. 주민들 1000여명을 과정리 신원국민학교 교실에 몰아넣은 군인들은 이튿날 동이 트자 주민들 중 군인, 경찰 가족을 둔 사람들을 제외한 517명을 인근 박산골로 데려가 살해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나뭇가지 등을 덮고 기름을 뿌린 뒤 불을 질러 태웠다. 이 때문에 후에 유족들은 희생된 가족들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1951년 2월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거창군 일대에서 719명의 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만행에 희생됐다.

지난 2017년 3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제66주기 합동위령제에서 한 유가족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거창군 제공)2017.3.30/뉴스1 © News1 이철우 기자

서씨의 가족 중에는 대밭에 소를 묶어 놓으러 간 서씨 본인과 군인들을 따라가지 않고 불타버린 집을 뒤지며 건질 수 있는 가재도구를 챙겼던 서씨의 조모만이 살아남았다. 군인들이 가족들을 끌고 가 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서씨의 할머니는 손자에게 "군인들을 따라갔으면 피난을 가서 살았을 텐데 왜 안 갔냐"고 타박을 하기도 했다. 서씨는 그날을 기억하면서 "따라갔으면 죽었을 텐데 그렇게 살게 됐다"고 회상했다.

70여년의 세월 동안 서씨와 같은 거창사건의 유족들은 갖은 고통을 당했다. 억울하게 가족을 잃었음에도 '용공분자'의 가족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연좌제의 대상이 됐고,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족회가 아예 '반국가단체'로 몰리며 고난을 겪었다. 정부는 유족들이 만든 합동묘소를 파헤쳤고 위령비를 뽑아 내용을 정으로 지우고 땅에 파묻기까지 했다.

유족들은 끊임 없는 노력으로 지난 1996년 '거창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뤄졌지만 국가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시효가 지나 국가배상의 의무가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국회에서 배상을 위한 법률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당시 탄핵 정국 속에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이 '재정 부담'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됐다. 이후에도 16대 국회부터 21대 국회까지 여러차례 관련법안이 안건으로 올라왔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서씨는 "배상은 금액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국가가 저지른 일에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연한데 배상 문제가 70여년 동안이나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원통하다고 말했다. 그는 "6.25 사변 이후 이와 비슷한 일이 많이 있었지만 진상조사가 이뤄지고 재판까지 끝나 국가의 책임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거창 사건이 유일하다"라며 "그때 내가 아홉살이었는 데 (지금까지 해결이 안된 것이) 기가 막히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이 개별적으로 재판을 통해 국가배상을 받으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2008년 대법원이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 만료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지만 2014년에는 판결이 뒤집혀 유족들이 배상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유족이 재판을 청구해 배상을 받기에는 돈이라는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1인당 수백만원의 소송 비용을 전체 유족들이 감당해 내기 어렵다는 것이 유족회의 설명이다.

거창사건 70주년 추모기간(2021.2.9.~2.11)을 하루 앞둔 8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거창사건 추모공원에 거창사건을 형상화한 가해자인 군인들과 민간인 희생자의 조각상이 70년 전 그날의 슬픔을 말해 주고 있다. 사진은 다중촬영 기법으로 촬영됐다. (거창군 제공) 2021.2.8/뉴스1

이성열 거창사건유족회 회장은 "21대 국회에서도 배상과 관련된 법안이 제출돼 있지만 국회의원들이 꼼짝을 안 하고 있다"라며 "거창 유족들의 표 수가 적어서 광주(5.18민주화운동)나 제주(4.3사건)처럼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어 이 회장은 과거사 사건의 명예회복과 배·보상 문제를 국정과제로 포함시켰던 만큼 거창유족들의 목소리를 대통령이 직접 듣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날이 풀리면 청와대 앞에서 집회라도 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거창사건은 국군 제11사단 9연대에 의해 자행됐다. 1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 내 산악지역으로 숨어든 인민군, 빨치산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해 지원 보급처를 끊는다는 명목으로 산간마을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마을을 불태웠다. 작전명은 '건벽청야'였다. 이중 거창군 일대의 작전을 담당한 11사단9연대3대대는 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공비와 내통했다며 살해했다.

사건은 그해 3월 거 창출신의 신중목 국회의원이 민간인 학살 내용을 국회에서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에 국회 내무부, 법무부, 국방부의 합동 진상조사를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군은 사건 현장에 방치된 어린이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암매장하거나 군인들을 무장공비로 위장시켜 조사를 나온 진상조사단에 사격을 가하는 등 진상규명 활동을 방해했다. 진상조사 방해에도 외신 등에서 지속해 문제가 제기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내무부와 법무부, 국방부까지 3부 장관을 해임했으나 사건을 '군이 용공분자 187명을 처형한 사건'이라고 호도하는 허위 담화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허위 담화문으로 논란이 더욱 커지고 여론이 들끓자 국회는 '양민학살 관련 책임자 처벌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해 책임자 처벌에 나섰다. 사건 발생 5개월여만인 7월에 대구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부가 구성돼 재판이 진행됐다. 학살관련 군관계자들은 모두 실형을 언도받았지만 이후 줄줄이 사면돼 군에 복직하거나 경찰 간부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거창사건의 유족들은 70년 전 하루아침에 가족들 잃었고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학살 범죄임이 밝혀졌지만, 가해자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배·보상도 이뤄지지 않았다.

70주년을 맞은 2021년 유족회와 거창군은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의 여파로 개최가 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상황에 대해 서씨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생존했던 1세대 유족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가고 있다. 최근에도 유족회 이사회에 갔더니 (유족) 두 사람이 돌아가셨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치매가 걸렸다고 한다"라며 사건을 기억하는 유족들이 모두 사망하기 전에 국가 차원의 배상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potgu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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